홍콩명품쇼핑몰 [정희진의 낯선 사이]축구협회의 ‘성 접대’와 한국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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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명품쇼핑몰 1967~1968년 브루스 커밍스는 서울에서 평화봉사단(US Peace Corps)의 일원으로 근무했다. 한국에 대한 그의 첫인상은 성매매였다. 숙소에서도 일터에서도 그를 쫓아다니며 “한국 여자를 살 수 있도록 해주겠다”는 한국 남성의 끈질긴 성 구매 권유에 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자국 여성을 외국 남성과의 관계에서 활용하려는 한국 남성 문화는 한반도 정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남성은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규범도 성평등에 어긋나지만, 이마저도 실제로는 실현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다. 한국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지 않거나 보호할 수 없었다. 당대에도 빈발하는 다양하고 심각한 젠더폭력은 ‘남성이 여성을 보호한다’는 통념의 적나라한 반례다. 특히 미 군정시기 그리고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성립된 한·미 동맹은 한국 여성과 외세(주한미군) 간의 성적 거래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문학평론가 정현기는 미 군정기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첫째,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당장 시급한 주택난과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세력은 미군이다. 둘째, 미군과 쉽게 선을 댈 수 있는 방법은 미군이 원하는, 미군이 필요로 하는 한국의 젊은 여자다. 셋째, 젊은 여자란 필연코 어느 한국인 가족의 딸이고 누나이고 여동생, 이웃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관계로 매인 젊은 여성이 외국인 병사(혹은 외국인 문관)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용인한다는 것은 한국인과 같은 단일 민족으로서의 민족적 자기 동일성이 뿌리째 훼손된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고 더더구나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입장에서 그런 풍경이 만연한다는 현실은 이중 삼중으로 한국인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위 글은 어쩔 수 없는 현실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외세에 의해 한국 여성이 겪는 폭력과 성적 착취는 불가피한 현상이 아니다. 흔히 강대국은 ‘남성’으로, 약소국은 ‘여성’으로 재현되지만 이 역시 통념일 뿐이다.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의하면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관계는 성별적 의미를 갖지만, 그것이 약소국 여성에 대한 강대국 남성의 성폭력과 성매매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약소국 내부의 성별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몸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 주둔하는 미군 남성이 주로 구매하는 것은 이탈리아 여성의 성(sexuality)이 아니라 가죽 가방이나 의류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는 미군은 그 누구도 사우디 여성과 접촉할 수 없다. 이슬람교의 영향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우디 정부는 데이트든 결혼이든 성매매든 자국 여성과 미군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 자국 여성을 ‘보호한다’.
이에 반해 우리 역사에서는 여성이 국가 간 관계의 희생양이 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여성을 중국에 공녀(貢女)로 보내기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還鄕女)’라 불렸으며, 이 말은 오늘날 ‘화냥년’의 어원으로 흔히 설명돼왔다. 남성 문화는 나라의 필요(?)에 의해 여성들을 물건처럼 활용했다. 국가의 변명대로 ‘어쩔 수 없이’ 여성의 몸을 필요로 했다면, 최소한 그들을 존중하거나 미안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들은 모욕과 멸시 속에 숨어 살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기지촌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민간 외교관”이라고 칭송했고 동시에 억압했다. 성병 검사를 빌미로 ‘기지촌 정화 사업’을 벌이며, 기지촌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공식적으로 관리했다. 1970년대는 이전의 미 군정기와 달리 살 곳과 먹을거리 사정이 나았던 시기다. 그런데도 기지촌 성 산업을 육성한 한국 정부의 정책은 ‘약소국의 비애’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군 위안부’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직적 전쟁 전략 중 하나였지만, 이에 협력한 한국 남성도 많았다.
사실 여성의 성을 매개로 한 남성들 간의 거래는 민족 문제나 과거사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남성 연대 문화의 중요한 작동 기제다. 내가 아는 가정폭력 가해 남성은 친구에게 도박 빚을 지자, 그 빚을 아내가 친구와 ‘잠자리를 갖게 함으로써’ 갚으려고 했다. 반면 여성 문화에서 남성의 몸을 물건으로 거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성의 성을 상대방 남성에게 제공하는 것은 돈이나 과일, 정육 등의 뇌물과 다르다. 이때 여성은 시민/사람이 아니라 여성의 몸 자체가 물건이 되어 화폐 가치를 갖게 된다. 당연히 여성의 외모, 나이 등이 ‘품질’로 취급되고, 이는 몸에 등급이 매겨지는 노예시장의 작동 원리와 같다.
대한축구협회의 성 접대는 관행?
축구협회의 각종 부패는 한국 축구 전력의 근본적 원인이다. 이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지난 8월6일 JTBC 뉴스의 단독 보도에 의하면, 축협은 ‘최소한’ 두 차례, 즉 2012 런던 올림픽 최종 예선전과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전에서 외국인 심판을 상대로 성 접대를 했다. 이는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감사에서 적발되었지만, 당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와중에서 검찰은 축협의 성 접대에 대해 “혐의 없음”으로 종결해 공론화 및 형사 처벌을 하지 않았다. JTBC가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도한 것이다.
2012년 감사원도 이를 적발했으나 ‘국격 실추’를 이유로 감사에 착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지점에서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강제 동원이든, 자원이든 성 접대에 개입된 여성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국격(한국 남성)만이 문제가 된다. “나라 망신” 여론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런 문제가 빈발하는 한국 사회 내부에 대한 비판은 없고 국제사회에 ‘알려지면’ 망신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일련의 ‘성 접대 시리즈’에 대해 축협은 15년 전에는 그런 일이 “관행”이었다고 해명하고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관행이면 잘못이 아닌가? 철저한 진상 규명과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미 군정기와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빈곤 ‘때문에’ 여성들이 가족 부양을 위해 미군에게 성을 제공했든, 지금처럼 한국이 잘살게 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자발성’을 가진 여성들이 스포츠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축구 지도자들의 애국심(?)에 의해 개입되었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가 국가 외부와의 관계에서 자국 여성의 성을 활용하는 현실과 사고방식이 문제다. 그리고 여성의 성을 활용하면서도 정작 당사자 여성을 멸시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의 성 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에 대해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성의 이중 기준(double standard)을 넘어서는 문제다. 남성 문화에서 여성의 몸은 출산이나 가사 노동과 같은 자국 남성을 위한 성역할 도구이거나 외국 남성과 벌이는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자원으로 기능한다. 한국의 여성과 남성은 같은 국민이 아니다. 남성이 국민이라면, 비(非)국민 여성은 국민인 남성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카드다.
이러한 문화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남성은 ‘구조적 가해자’가 된다. 축구협회의 성 접대를 국내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로 사유하지 않고, “(남성) 국가의 망신”으로 보는 관점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골프 접대는 덜 창피하고 국가가 자국 여성의 성을 활용하는 것은 더 창피한 일인가? 여성의 선택 여부와 무관하게, 국가가 언제든 여성의 몸을 동원할 수 있는 문화에서는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일상에서의 젠더폭력 구조와 연관된다.
2022년, 한국의 여성운동은 8년3개월간에 걸친 투쟁 끝에 대법원으로부터 기지촌 성 산업을 국가폭력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기지촌 성 산업 종사자를 빈곤·젠더·지역 등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피해자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축구협회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을 때 참조해야 할 중요한 판례다.
“한국 정치는 생수 한 병만큼의 효용도 주지 못한다”고, 한 소설가가 말한 적이 있다. 이제는 표현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효용은커녕 참을 수 없는 분노 유발의 수준으로 정치가 나빠졌다. 장동혁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거리의 민주투사 행세를 하는 것을 보라. ‘아이큐’나 ‘배신’ 같은 용어를 주고받은 김민석·정청래·송영길의 저열함에, 최민희 등 최고위원 후보들이 보여준 몰상식을 보라. 정치를 망치는 이들을 정치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역설이 괴롭다.
많은 평론가가 양당 내부의 갈등을 ‘감정 대립’ 정도로 보는 듯하다. 안이해 보인다. 미래를 두고 경쟁해야지 왜 과거에 집착하냐고 야단도 친다. 식상하다. “주권자 뜻에 따른 개헌론”을 말한 국회의장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오해를 풀라”고 권면하는 것은 더 비현실적이다. 22대 국회의 의장 자리는 팬덤 추종자이자 대통령 ‘정무특보’의 몫이다. 대통령 팬덤이 그러라고 하지 않는 한, 의장은 개헌을 포기할 수 없다.
22대 국회에서 권력 분립은 실천되지 않을 것이다. 몽테스키외가 경고했듯 견제와 균형이 없는 권력은 ‘전제(despotism)’를 낳는다. ‘윤어게인’을 추종하는 국민의힘 지도부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국민의 성공’이 아니라 ‘이재명의 성공’을 주문처럼 외는 민주당 의원들의 추종도 기이하기는 매한가지다. 필자가 볼 때, 양당은 전체주의의 신세계로 들어섰다. 양당은 몰락할 때까지 지금 같을 것이다.
양당은 자신들보다 더 민주적인 정당은 없다고 자신한다. 국민의힘은 “100% 당원 정당”을 먼저 실현했다. 민주당은 150만 권리당원의 “1인1표주의”를 표방하며 앞서가려 한다. 양당이 당원 주권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치자. 그래도 정의는 정확해야 한다. 그것은 ‘다원적 민주주의’와는 종류가 다른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에 상존하는 위험이다. 민주주의 이전에 권위주의는 있어도 전체주의는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자라나는 병리 현상이 전체주의다. 민주주의는 대중 정치를 특징으로 한다. 전체주의자도 대중을 사랑한다. 대중은 강한 힘에 이끌린다는 것이 전체주의의 신념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은 권력 투쟁을 사랑하고, 권력을 향한 길에 대중을 앞장세우길 좋아한다.
권위주의는 다르다. 박정희 정권에서 보았듯, 권위주의는 가난과 저발전을 넘어서려는 ‘후발의 열정’에 의존한다. ‘추격 발전’을 완수하기 위해 시민권을 유보하자는 게 권위주의다. 권위주의자는 민주주의를 싫어한다. 그들은 대중 동원을 ‘소요사태’로 간주하고 정당 정치를 ‘부패·비효율’과 동일시한다.
에스파냐 출신의 정치학자 후안 린츠가 강조하듯, ‘반정치’와 ‘탈동원’은 권위주의의 유형론적 특징이다. 전체주의는 그와 다르다. 전체주의는 인민을 동원한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동원한다. 대중의 동원과 팬덤의 정치화야말로 전체주의자들이 선망하는 최고 경지의 지배다. 이게 핵심이다.
권위주의자와는 달리 전체주의자는 단순한 반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인민 주권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공유하는 가치다. 다만 민주주의자는 인민을 서로 다른 열정과 이해관계를 갖는 ‘다원화된 주체’로 본다. 복수의 인민 집단 사이에서 전개되어야 할 자유로운 토론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생명 원리임을 존중한다. 정치의 실력이란 이견과의 협의, 반대와의 타협을 통해 발휘된다는 사실 또한 잘 이해하는 쪽이 민주주의자다.
전체주의자도 민주주의를 말하고 인민의 뜻을 존중한다. 다만 민주주의자에게 인민이 ‘복수의 연합체’로 이해되는 반면, 전체주의자에게 인민은 하나의 의지를 가진 ‘일원적 전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의 총회는 ‘하나의 옮음’만 존재해야 하는 ‘이단 척결 대회’와 유사하다. 민주주의자는 토론에서 상대에게 거부감을 덜 주는 언어를 사용한다. 전체주의적 심성을 가진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경쟁 상대를 이적시하려는 욕구를 참지 못한다.
상대를 최고 권력에 협조하지 않는 배신자,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이방인, 지능이 낮은 우생학적 무능력자로 몰아세우는 건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심성에서 발원하는 습성이다. ‘배신의 아이콘’ ‘붕어 아이큐’란 신묘한 표현까지 고안해내는 전체주의자들의 정치는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전국 과학고의 2027학년도 신입생 선발 규모가 역대 최대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계약학과 신설 등 이공계 인재 육성 정책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의대 쏠림 현상이 완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7일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7학년도 전국 과학고 선발 인원은 1858명으로 집계됐다. 전년보다 216명(13.25%) 늘어난 규모로 1983년 과학고가 설립된 이후 가장 많다.
이공계 인재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과학고는 현재 전국에서 22곳이 운영되고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에 부천과학고와 분당중앙과학고가 2027학년도부터 신설돼 각각 100명씩 총 200명을 선발한다. 전북 익산의 전북과학고도 입학 정원을 기존 80명에서 96명으로 확대한다.
과학고 졸업생들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성균관대에 가장 많이 진학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두 대학 모두 삼성전자와 연계한 반도체 계약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반도체 계약학과는 대학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과 협약을 맺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반도체 전문 인재를 양성하는 학과다.
이공계 인재 육성 정책 확대와 함께 지역의사제가 도입되면서 이과 성향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역의사제는 의대 입학 단계에서 별도로 학생을 선발해 학비 등을 지원하는 대신 졸업 후 일정 기간 특정 지역에서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하는 제도로 2027학년도 대입부터 시행된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KAIST와 성균관대에 개설된 대기업 반도체 계약학과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과학고 출신 학생들의 진학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2027학년도 과학고 원서 접수는 18일부터 9월3일까지 진행된다. 면접은 오는 11월13일부터 28일까지 실시되며 합격자는 11월25일부터 12월2일까지 발표된다.
자국 여성을 외국 남성과의 관계에서 활용하려는 한국 남성 문화는 한반도 정세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고, 특히 한국 현대사에서 익숙한 풍경이다. “남성은 여성을 보호해야 한다”는 규범도 성평등에 어긋나지만, 이마저도 실제로는 실현되지 않는 이데올로기다. 한국 남성은 여성을 보호하지 않거나 보호할 수 없었다. 당대에도 빈발하는 다양하고 심각한 젠더폭력은 ‘남성이 여성을 보호한다’는 통념의 적나라한 반례다. 특히 미 군정시기 그리고 이후 한국전쟁을 계기로 성립된 한·미 동맹은 한국 여성과 외세(주한미군) 간의 성적 거래에 의해 유지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88년, 문학평론가 정현기는 미 군정기의 한국 사회에 대해 이렇게 썼다. “첫째, 한국인의 입장에서 볼 때 당장 시급한 주택난과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는 세력은 미군이다. 둘째, 미군과 쉽게 선을 댈 수 있는 방법은 미군이 원하는, 미군이 필요로 하는 한국의 젊은 여자다. 셋째, 젊은 여자란 필연코 어느 한국인 가족의 딸이고 누나이고 여동생, 이웃일 수밖에 없는데 이런 관계로 매인 젊은 여성이 외국인 병사(혹은 외국인 문관)와 성관계를 갖는 것을 용인한다는 것은 한국인과 같은 단일 민족으로서의 민족적 자기 동일성이 뿌리째 훼손된다는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고 더더구나 집도 없고 먹을 것도 없는 입장에서 그런 풍경이 만연한다는 현실은 이중 삼중으로 한국인의 수치심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위 글은 어쩔 수 없는 현실 같지만, 그렇지 않다. 외세에 의해 한국 여성이 겪는 폭력과 성적 착취는 불가피한 현상이 아니다. 흔히 강대국은 ‘남성’으로, 약소국은 ‘여성’으로 재현되지만 이 역시 통념일 뿐이다. 캐서린 문의 <동맹 속의 섹스>에 의하면 강대국과 약소국 사이의 관계는 성별적 의미를 갖지만, 그것이 약소국 여성에 대한 강대국 남성의 성폭력과 성매매가 필연적이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이는 약소국 내부의 성별 관계에 따라 달라진다.
남성 사회에서 여성의 몸
예를 들어 이탈리아에 주둔하는 미군 남성이 주로 구매하는 것은 이탈리아 여성의 성(sexuality)이 아니라 가죽 가방이나 의류다. 사우디아라비아에 주둔하는 미군은 그 누구도 사우디 여성과 접촉할 수 없다. 이슬람교의 영향도 있겠지만, 어쨌든 사우디 정부는 데이트든 결혼이든 성매매든 자국 여성과 미군의 접촉을 철저히 차단, 자국 여성을 ‘보호한다’.
이에 반해 우리 역사에서는 여성이 국가 간 관계의 희생양이 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고려 말과 조선 초에는 여성을 중국에 공녀(貢女)로 보내기도 했다. 고국으로 돌아온 여성들은 ‘환향녀(還鄕女)’라 불렸으며, 이 말은 오늘날 ‘화냥년’의 어원으로 흔히 설명돼왔다. 남성 문화는 나라의 필요(?)에 의해 여성들을 물건처럼 활용했다. 국가의 변명대로 ‘어쩔 수 없이’ 여성의 몸을 필요로 했다면, 최소한 그들을 존중하거나 미안해해야 하지 않을까. 하지만 그녀들은 모욕과 멸시 속에 숨어 살았다.
1970년대 박정희 정부는 기지촌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외화를 벌어들이는 민간 외교관”이라고 칭송했고 동시에 억압했다. 성병 검사를 빌미로 ‘기지촌 정화 사업’을 벌이며, 기지촌 성 산업에 종사하는 여성들을 공식적으로 관리했다. 1970년대는 이전의 미 군정기와 달리 살 곳과 먹을거리 사정이 나았던 시기다. 그런데도 기지촌 성 산업을 육성한 한국 정부의 정책은 ‘약소국의 비애’가 아니라 자발적 선택이라는 점을 보여준다. 일제 식민지 시기 ‘일본군 위안부’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는 일본 제국주의의 조직적 전쟁 전략 중 하나였지만, 이에 협력한 한국 남성도 많았다.
사실 여성의 성을 매개로 한 남성들 간의 거래는 민족 문제나 과거사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남성 연대 문화의 중요한 작동 기제다. 내가 아는 가정폭력 가해 남성은 친구에게 도박 빚을 지자, 그 빚을 아내가 친구와 ‘잠자리를 갖게 함으로써’ 갚으려고 했다. 반면 여성 문화에서 남성의 몸을 물건으로 거래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여성의 성을 상대방 남성에게 제공하는 것은 돈이나 과일, 정육 등의 뇌물과 다르다. 이때 여성은 시민/사람이 아니라 여성의 몸 자체가 물건이 되어 화폐 가치를 갖게 된다. 당연히 여성의 외모, 나이 등이 ‘품질’로 취급되고, 이는 몸에 등급이 매겨지는 노예시장의 작동 원리와 같다.
대한축구협회의 성 접대는 관행?
축구협회의 각종 부패는 한국 축구 전력의 근본적 원인이다. 이를 모르는 국민은 없다. 지난 8월6일 JTBC 뉴스의 단독 보도에 의하면, 축협은 ‘최소한’ 두 차례, 즉 2012 런던 올림픽 최종 예선전과 2014 브라질 월드컵 예선전에서 외국인 심판을 상대로 성 접대를 했다. 이는 2016년 문화체육관광부 감사에서 적발되었지만, 당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와중에서 검찰은 축협의 성 접대에 대해 “혐의 없음”으로 종결해 공론화 및 형사 처벌을 하지 않았다. JTBC가 10년이 지난 지금 다시 보도한 것이다.
2012년 감사원도 이를 적발했으나 ‘국격 실추’를 이유로 감사에 착수하지 않은 것으로 드러났다. 이 지점에서 한국 사회의 여성에 대한 태도가 드러난다. 강제 동원이든, 자원이든 성 접대에 개입된 여성들의 인권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고, 오로지 국격(한국 남성)만이 문제가 된다. “나라 망신” 여론도 같은 맥락에 있다. 이런 문제가 빈발하는 한국 사회 내부에 대한 비판은 없고 국제사회에 ‘알려지면’ 망신이라는 사고방식이다.
일련의 ‘성 접대 시리즈’에 대해 축협은 15년 전에는 그런 일이 “관행”이었다고 해명하고 지금은 그런 일이 없다(?)고 한다. 관행이면 잘못이 아닌가? 철저한 진상 규명과 그에 따른 책임을 져야 한다.
문제는 이것이다. 미 군정기와 1970년대 한국 사회의 빈곤 ‘때문에’ 여성들이 가족 부양을 위해 미군에게 성을 제공했든, 지금처럼 한국이 잘살게 된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자발성’을 가진 여성들이 스포츠 경기에서 이기기 위한 축구 지도자들의 애국심(?)에 의해 개입되었든 그것은 그리 중요하지 않다. 예나 지금이나 한국 사회가 국가 외부와의 관계에서 자국 여성의 성을 활용하는 현실과 사고방식이 문제다. 그리고 여성의 성을 활용하면서도 정작 당사자 여성을 멸시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가부장제 사회의 성 문화에서 남성과 여성에 대해 다른 잣대를 들이대는 성의 이중 기준(double standard)을 넘어서는 문제다. 남성 문화에서 여성의 몸은 출산이나 가사 노동과 같은 자국 남성을 위한 성역할 도구이거나 외국 남성과 벌이는 협상을 유리하게 만들 수 있는 자원으로 기능한다. 한국의 여성과 남성은 같은 국민이 아니다. 남성이 국민이라면, 비(非)국민 여성은 국민인 남성 플레이어가 사용할 수 있는 일종의 카드다.
이러한 문화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을 때, 남성은 ‘구조적 가해자’가 된다. 축구협회의 성 접대를 국내에서의 남성과 여성의 권력관계로 사유하지 않고, “(남성) 국가의 망신”으로 보는 관점도 이와 연관되어 있다. 골프 접대는 덜 창피하고 국가가 자국 여성의 성을 활용하는 것은 더 창피한 일인가? 여성의 선택 여부와 무관하게, 국가가 언제든 여성의 몸을 동원할 수 있는 문화에서는 여성의 몸은 여성 자신의 ‘것’이 될 수 없다. 그리고 이는 일상에서의 젠더폭력 구조와 연관된다.
2022년, 한국의 여성운동은 8년3개월간에 걸친 투쟁 끝에 대법원으로부터 기지촌 성 산업을 국가폭력으로 인정받는 데 성공했다. 이는 한국 사회가 기지촌 성 산업 종사자를 빈곤·젠더·지역 등으로 인한 사회구조의 피해자로 인식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판결이 아닐 수 없다. 축구협회가 자신들이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 깨달을 때 참조해야 할 중요한 판례다.
“한국 정치는 생수 한 병만큼의 효용도 주지 못한다”고, 한 소설가가 말한 적이 있다. 이제는 표현을 달리해야 할 것 같다. 효용은커녕 참을 수 없는 분노 유발의 수준으로 정치가 나빠졌다. 장동혁이 태극기를 휘날리며 거리의 민주투사 행세를 하는 것을 보라. ‘아이큐’나 ‘배신’ 같은 용어를 주고받은 김민석·정청래·송영길의 저열함에, 최민희 등 최고위원 후보들이 보여준 몰상식을 보라. 정치를 망치는 이들을 정치인이라고 불러야 하는 역설이 괴롭다.
많은 평론가가 양당 내부의 갈등을 ‘감정 대립’ 정도로 보는 듯하다. 안이해 보인다. 미래를 두고 경쟁해야지 왜 과거에 집착하냐고 야단도 친다. 식상하다. “주권자 뜻에 따른 개헌론”을 말한 국회의장에게 “실수를 인정하고 오해를 풀라”고 권면하는 것은 더 비현실적이다. 22대 국회의 의장 자리는 팬덤 추종자이자 대통령 ‘정무특보’의 몫이다. 대통령 팬덤이 그러라고 하지 않는 한, 의장은 개헌을 포기할 수 없다.
22대 국회에서 권력 분립은 실천되지 않을 것이다. 몽테스키외가 경고했듯 견제와 균형이 없는 권력은 ‘전제(despotism)’를 낳는다. ‘윤어게인’을 추종하는 국민의힘 지도부가 제정신이 아니라면, ‘국민의 성공’이 아니라 ‘이재명의 성공’을 주문처럼 외는 민주당 의원들의 추종도 기이하기는 매한가지다. 필자가 볼 때, 양당은 전체주의의 신세계로 들어섰다. 양당은 몰락할 때까지 지금 같을 것이다.
양당은 자신들보다 더 민주적인 정당은 없다고 자신한다. 국민의힘은 “100% 당원 정당”을 먼저 실현했다. 민주당은 150만 권리당원의 “1인1표주의”를 표방하며 앞서가려 한다. 양당이 당원 주권에 기초를 둔 민주주의를 실천하고 있다고 치자. 그래도 정의는 정확해야 한다. 그것은 ‘다원적 민주주의’와는 종류가 다른 ‘전체주의적 민주주의’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깝다. 전체주의는 민주주의에 상존하는 위험이다. 민주주의 이전에 권위주의는 있어도 전체주의는 있을 수 없다. 오로지 민주주의에서만 자라나는 병리 현상이 전체주의다. 민주주의는 대중 정치를 특징으로 한다. 전체주의자도 대중을 사랑한다. 대중은 강한 힘에 이끌린다는 것이 전체주의의 신념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은 권력 투쟁을 사랑하고, 권력을 향한 길에 대중을 앞장세우길 좋아한다.
권위주의는 다르다. 박정희 정권에서 보았듯, 권위주의는 가난과 저발전을 넘어서려는 ‘후발의 열정’에 의존한다. ‘추격 발전’을 완수하기 위해 시민권을 유보하자는 게 권위주의다. 권위주의자는 민주주의를 싫어한다. 그들은 대중 동원을 ‘소요사태’로 간주하고 정당 정치를 ‘부패·비효율’과 동일시한다.
에스파냐 출신의 정치학자 후안 린츠가 강조하듯, ‘반정치’와 ‘탈동원’은 권위주의의 유형론적 특징이다. 전체주의는 그와 다르다. 전체주의는 인민을 동원한다. 그것도 아주 적극적으로 동원한다. 대중의 동원과 팬덤의 정치화야말로 전체주의자들이 선망하는 최고 경지의 지배다. 이게 핵심이다.
권위주의자와는 달리 전체주의자는 단순한 반민주주의자가 아니다. 인민 주권은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공유하는 가치다. 다만 민주주의자는 인민을 서로 다른 열정과 이해관계를 갖는 ‘다원화된 주체’로 본다. 복수의 인민 집단 사이에서 전개되어야 할 자유로운 토론이야말로 민주주의의 생명 원리임을 존중한다. 정치의 실력이란 이견과의 협의, 반대와의 타협을 통해 발휘된다는 사실 또한 잘 이해하는 쪽이 민주주의자다.
전체주의자도 민주주의를 말하고 인민의 뜻을 존중한다. 다만 민주주의자에게 인민이 ‘복수의 연합체’로 이해되는 반면, 전체주의자에게 인민은 하나의 의지를 가진 ‘일원적 전체’다. 그래서 전체주의자들의 총회는 ‘하나의 옮음’만 존재해야 하는 ‘이단 척결 대회’와 유사하다. 민주주의자는 토론에서 상대에게 거부감을 덜 주는 언어를 사용한다. 전체주의적 심성을 가진 이들은 다르다. 그들은 경쟁 상대를 이적시하려는 욕구를 참지 못한다.
상대를 최고 권력에 협조하지 않는 배신자, 이 자리에 있어서는 안 될 이방인, 지능이 낮은 우생학적 무능력자로 몰아세우는 건 우연이나 실수가 아니라 그들의 심성에서 발원하는 습성이다. ‘배신의 아이콘’ ‘붕어 아이큐’란 신묘한 표현까지 고안해내는 전체주의자들의 정치는 참을 수 없는 지경까지 왔다.
전국 과학고의 2027학년도 신입생 선발 규모가 역대 최대 수준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반도체 계약학과 신설 등 이공계 인재 육성 정책이 강화되는 상황에서 의대 쏠림 현상이 완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17일 종로학원에 따르면 2027학년도 전국 과학고 선발 인원은 1858명으로 집계됐다. 전년보다 216명(13.25%) 늘어난 규모로 1983년 과학고가 설립된 이후 가장 많다.
이공계 인재 양성을 목표로 설립된 과학고는 현재 전국에서 22곳이 운영되고 있다. 이 가운데 경기도에 부천과학고와 분당중앙과학고가 2027학년도부터 신설돼 각각 100명씩 총 200명을 선발한다. 전북 익산의 전북과학고도 입학 정원을 기존 80명에서 96명으로 확대한다.
과학고 졸업생들은 한국과학기술원(KAIST)과 성균관대에 가장 많이 진학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두 대학 모두 삼성전자와 연계한 반도체 계약학과를 운영하고 있다. 반도체 계약학과는 대학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대기업과 협약을 맺고 기업이 필요로 하는 반도체 전문 인재를 양성하는 학과다.
이공계 인재 육성 정책 확대와 함께 지역의사제가 도입되면서 이과 성향 학생들의 진로 선택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지역의사제는 의대 입학 단계에서 별도로 학생을 선발해 학비 등을 지원하는 대신 졸업 후 일정 기간 특정 지역에서 의무적으로 근무하도록 하는 제도로 2027학년도 대입부터 시행된다.
임성호 종로학원 대표는 “KAIST와 성균관대에 개설된 대기업 반도체 계약학과에 대한 선호도가 높아지면서 과학고 출신 학생들의 진학도 늘어난 것으로 보인다”고 분석했다.
2027학년도 과학고 원서 접수는 18일부터 9월3일까지 진행된다. 면접은 오는 11월13일부터 28일까지 실시되며 합격자는 11월25일부터 12월2일까지 발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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